아빠 노무현 왜 죽었어?

 

오래간만에 아이가 전화에서 하는 말입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미국에서 공부하였기에 “서거”, “돌아가셨다”는 말은 모르는 아이니 양해 바랍니다.

 

, 그래. 하고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바쁘니 e-mail 보내마 했습니다. 그 아이는 대통령 되기 이전 가끔 제가 고인의 얘기를 하였기에 제가 고인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아이입니다. 아래 글은 우리 막내 아이에게 보내는 e-mail 내용입니다.

 

노무현, 그는 가족들과 친구, 친지와 여러 사람들과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내 주었다. 자기 목숨을 던져 마지막 승부를 하였다. 그리고 이겼다.

 

내가 아는 그는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길 밖에 없었다. 길이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안다. 목숨을 내 던지는데 감옥 가는 것 뭐 무서우랴. 그런데 자기 한 몸 감옥가면 해결되면 좋은데 이건 반대로 감옥 가면 모든 사람이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다닐 때 진영에서 열차 통학을 하였다. 새벽 다섯 시 조금 지나 기차를 타고 학교에 가서 도시락 한 개 먹고 저녁 아홉 시 가까운 시간에 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는 그런 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도시락 두 개 갖고 다니지 할지 모르지만 보리밥에 김치 도시락 한 개도 겨우 싸는데 빵을 사먹지 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겨울 철에는 산골 바람이 세기도 하지만 낮 시간이 짧아서 학교 근처에서 자취생활 하였으니 쌀자루 울러 메고 다녔다.

 

겨우겨우 졸업하여 취직하였으나 변변한 기업체 하나 없던 그런 시절이라 늦은 나이에 고졸 독학 변호사가 되었다. 이 세상은 줄이 있어야 하는데 판사로서도 그 꿈을 펼 수가 없었다. 아무런 줄이 없지 않느냐? 명문 고등학교만 졸업했어도 줄이 있는데 그게 없었다. 진영이라는 시골 출신, 상업고등학교 졸업에 친가나 처가에 누구 하나 도와 줄 사람은 커녕 도와 주어야 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처음에는 지역의 부산상고 출신 동창들이 많았기에 변호사 선임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것도 잠시, 인권 관련 변호를 하면서부터는 아예 “노무현이에게 맡기면 안 된다. 무조건 진다” 라는 말이 나왔었다. 그 당시 세상은 그런 세상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돈이 되는 소송들은 들어 오지를 않고 돈 없고 힘 없는 서민들 노동자들의 억울한 사람들의 변론을 맡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정부 당국의 억압과 부당한 일들을 겪으면서 자연스레 인권과 사회 정의를 찾는 일들을 하게 되었었다.

 

그가 후에 대통령 선거에서 호남 지역의 표를 많이 얻게 된 것도 창원과 울산 지역의 많은 근로자들이 호남 사람들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대통령 재임 시절 600만 불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돈 받을 사람이 아니다. 학교 다닐 때 집에서 기차역까지 뭐 버스나 전철로 바꿔 타는 것 아니다. 캄캄한 밤길을 걸어 다녔다. 범일 역(간이역 비슷하다)에서 학교 까지도 걸어서 다녔다. 인권 변호사, 야당 시절에는 아주 조그만 문제만 생기면 바로 감옥으로 가는 그런 시절을 지낸 사람이다. 사치와 허영 낭비 이런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대통령 되기 몇 년 전 지하철 타고 다녔다. 서울 역삼 전철역 부근 하로등선이라는 막걸리도 팔고 식사도하는 음식점 경영했었다. 국회의원 출마했다 떨어지고 김홍신, 김정길씨 등 세 사람 합작이었다

 

짐작컨데 600만불은 권여사가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대통령은 몰랐었고, 고위 공직자들에게 돈이나 선물을 직접 전달하는 게 얼마나 어렵다는 것은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총리 급 이상이 참석하는 공공 연회나 식장에 들어 가려면 신원조회가 끝나야 하도록 되어있고 대통령 가까이 어떤 물건을 가져 가려면 그 절차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냥 돈 가방 들고 가서 주면 되는 그런 게 아니다.

 

권양숙여사, 부산의 연지 럭키화학 공장 다녔다. 지금의 LG의 창업 시절이었다. 그 당시 조그만 공장이었으나 그래도 월급 미루지 않고 제때에 주는 그런 좋은 직장이었다. 회색 작업복 입고 머리에 수건 쓰고 조그만 쪽문으로 들어가서 12시간을 일하는 그런 공장이었다.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이 일하는 공장인데 주간 일주일 야간 일주일 교대로 일하였는데 월급 적게 주려고 1년 일하고 나면 그만 두어야 하고 바로 다음날 다시 입사하여 일하는 임시 일용직 노동자였다.

 

돈을 벌지 못하는 인권변호사 시절, 국회의원 출마하여 낙선, 야당 국회의원, 그런 시절을 보내면서 자식들에게는 그런 경제적인 어려움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그런 일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600만불 사건이 알려진 후에 노 전대통령이 알았다고 하더라도 크게 나무지는 못했으리라 짐작한다. 자식들 키우고 공부 시키는 것 누가 어떻게 한 건데 하면 그래 미안하다. 정도 얘기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1억 짜리 시계 얘긴데 그런 시계 받을 사람 아니다. 만약 받았다면 그냥 좋은 시계 하나라고 생각했을지는 모르겠다. 측근들의 얘기로는 본 적도 없었다고 했다. 논 바닥에 버렸다는 얘기는 안 받았다고 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아 검찰 측에서 주었다고 주장 하니까 그냥 “응 그래요 논바닥에 버렸다” 라고 했을 것 같다.

 

변호사라서 죽었다.

그는 변호사였다. 그리고 승부사였다. 정면으로 돌파하는………..

처음부터 검찰 측에서는 주변의 약하고 만만한 사람들부터 하나 둘씩 잡아들였다. 그리고 권여사 마지막으로 노 전대통령.

 

주 목표는 노 전대통령인데 그 가지들을 먼저 치고 자르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노 전대통령 이외의 측근들은 거의 참고인으로 불려갔다.

 

변호사는 법정에서 말한다. 설령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숨겨 두었다가 법정에서 그것도 맨 마지막에 그것을 제시하여 재판에서 승리하여야 하는 것이 변호사가 하는 일이다. 돈이고 시계고 모든 것은 법정에서 재판으로 확정되는 것이다. 설령 1심에서 유죄가 되어도 2심 3심이 있다. 그 때 까지는 정권이 대통령이 바뀌게 되는 것이고 또 사면이란 게 있다.

 

그런데 왜 죽었나요.

한국의 검찰은 미국과는 달리 수사권이 있다. (미국의 검찰은 수사권은 없고 기소권 만 있는 나라이다) 노 전대통령은 피의자 신분이었고 부인, 아들, 딸들은 참고인 자격이었다. 그래서 피의자가 죽으면 공소권이 없어진다. 그래서 검찰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즉 아무런 조사도 더 이상 법적으로 정식으로 받지 않아도 되고 600만 불의 돈에 대해서도 반환 압수 벌금 등 아무런 조치도 하지 못한다. 정식으로, 법적으로.

 

그리고 그는 따뜻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권력에서 물러 난 후에는 그 동안 가까이 있던 사람, 신세 진 사람들도 찾지 않고 멀리하게 된다. 그것은 의리의 문제도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공직자나 사업가가 권력에서 물러 난 사람을 찾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여러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죽음으로 주변에서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 좀 더 자유스럽게 되었다. 그리고 관련하여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재판에서 관련한 실질 세력이 없어졌기 때문에 상당히 유리한 재판을 받게 되리라 생각된다.

 

그가 내린 결론은 내가 살아 있어봐야 내 가족들과 친구, 친지들에게 별 도움을 줄게 없다. 재판에 가서 내가 이겨 봐야 국력의 손실, 국가 신인도의 손실이 더 크다. 정면으로 승부하자. 내 목숨을 건다. 던진다.

이런 생각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 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그리고 무슨 일을 옳고 좋은 일 꼭 해야 하는 일이라도 그일 하려면 얼마나 어려운데

대통령 몬해 묵겠다.(갱상도 사투리) 그렇다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탄핵사건에서 복귀하면 바로 사퇴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그렇게 자신 있게 얘기 했었다.

 

탄핵 재판 판결 나는 날 대통령직 사퇴한다. 확신한다

 

왜 그때 사퇴하지 안 했을까? 여러 가지 꼭 해야 할 일이 많아서였나? 국가가 혼란스러워 질까 염려되어서, 아니면 주위에서 말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였나?

슬프고 원망스럽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America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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